[최송목 칼럼] 갑질은 사라질 것인가?

노예제도를 유지시키는 것은 악랄한 갑이 아니라 친절한 갑이다.

최송목 승인 2023.07.07 09:46 | 최종 수정 2023.07.10 14:11 의견 0
최송목 논설위원

최근 직장 갑질에 대한 전반적인 사회적 지탄이 잦아지고 기업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갑질이 자취를 감추는 추세다. 직장인들에게도 희망이 보이는 듯하다. 또 과거 출세를 향해 전력투구했던 선배들에 비해 소소하게 인생을 즐기는 소확행과 워라밸도 자리 잡아가고 있다. 소위 욕망에 가득 찼던 쉰 세대에서 ‘욕망이 거세'된 신세대 젊은이들로 사회 구성원이 바뀌면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변화다.

과거 일방적이고 극단의 을이었던 직장인들이 점차 자기 목소리를 높임에 따라 권력과 이익의 쏠림현상이 희석되어 점차 중간지대로 이동하고 있다. 그동안 자기 소유의 회사 ‘오너’라는 이름으로 절대적인 갑을 누렸던 사장들이 점차 갑의 지위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사장은 곧 '갑'이라는 등식의 의미가 퇴색되고 옛날처럼 대 놓고 갑질하기는 어려워졌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향후 직장에서 갑과 을은 조만간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다.

과연 이렇게 순조롭게 갑의 소멸이 잘 진행될 수 있을까? 향후 사장이라는 '갑'은 완전하게 사라질 수 있을까? 그리하여 종국에는 직장 내 사장과 직원은 평등함을 실현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잠시 시대정신의 유행에 따른 풍선 효과로 그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부드러운 분위기는 반짝 여론과 휴머니즘이라는 파도에 갑이 잠깐 밀려났을 뿐 갑질은 소멸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배의 욕망과 그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욕구는 인간이 존재한 이후로 계속 이어 온 충돌과 모순이었다. 지배하려는 자도 지배당하는 자도 동일류 ‘사람’이다. 즉, 인간의 지배 욕망이 잠재하고 조직이 존재하는 한 갑질은 사라질 수 없는 하나의 세트(pair)라 할 수 있다. 이점에서 갑질은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떨칠 수 없는 일종의 유전적 유산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또 갑을관계는 지배와 피지배라는 관점에서 엘리트주의와 일부분 오버랩되는 지점이 있다. 과거 소수 엘리트집단에 의한 지배개념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불평등과 사회분열, 붕괴를 초래하며 민주주의와 끊임없이 충돌해 왔다. 오늘날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많이 개선되고는 있다고는 하나 엘리트주의는 여전히 건재하다.

한편, 을의 피지배 니즈 표현도 더 적극적이고 강열해져 갑질을 부추기고 있다. 을의 각종 권리요구는 역설적으로 '을이고 싶은 ‘ 강열한 몸짓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조직 지배에 대한 보상으로 오는 생활의 안정과 소행복의 추구 경향이 오히려 더 회사라는 갑의 존재감을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회사라는 울타리 내 소자유와 안락함에 길들여져 자기도 모르게 구심력의 지배를 받고 있다. 동물원의 호랑이가 자유를 포기하고 울타리에 갇히는 대가로, 사냥이라는 수고로움을 덜면서 편안하게 사육사가 주는 먹이를 취하는 반대급부를 누리는 것처럼 말이다. 노동운동과 권리 주장 또한 일견 노동자인 '을'의 권리 확장과 발전에 기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갑의 존재를 계속 인정하고 그가 그 위치에 지속적으로 존재하기를 강력하게 원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을의 지배자가 되려는 욕망도 갑의 존재를 부각하는 효과가 있다.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는 '소확행은 개혁의 씨앗이다'라는 칼럼에서 직장에서 “사장까지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은 사주의 온갖 추잡한 갑질에 순응하게 만든다고 했다. 만약 그런 욕망을 갖고 있는 사원이 90% 이상이라면, 그 기업의 사장은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왕국을 가진 거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런 가정이라면 미래 회사는 고액연봉, 좋은 복지와 주택제공 같은 안락함으로 직장인을 사육하려 들 것이고, 직원 '을'은 더욱더 세련된 모습으로 그런 갑에게 다가가기 위해 다양한 노예상품을 선보이며 아부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갑과 을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까? 갑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자율, 평등, 복지를 내세우며 한층 더 친절한 지배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포근한 지배로 피지배자의 감각을 마비시킬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가장 악랄한 노예주는 노예를 학대하는 자가 아니라 노예에게 온정을 베푸는 자다"라고 했다. 노예제도를 유지시키는 것은 악랄한 갑이 아니라 친절한 갑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갑질은 더욱더 꽁꽁 숨거나 더 잘 포장되어 존재해 갈 가능성이 커졌다. 지금은 그저 시야에서 잠시 쪼그라들어 형상만 위축되었을 뿐 그 잠재적인 지배욕망은 그대로다. 옛날처럼 대 놓고 갑질하기는 어려워졌지만, 인간 조직의 피라미드 구조 상단에 자리 잡고 있는 지배욕이라는 갑의 본질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통상 건강한 갑을관계를 상생관계라 말한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 될 때 사육관계가 성립된다. 회사가 직원을 수단으로 보게 되면 사육하려는 마음이 싹트고, 역으로 직원이 회사를 자기 성공의 수단으로만 보고 마음에도 없는 적극적이고 자발적 노동을 발휘할 때 노예관계가 성립한다. 이때 회사는 직원을 회사 존재를 위한 필요 수단 내지 기능으로 보고 그 순기능과 역기능의 역학구조에만 골똘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한때 좋은 직장의 대명사였던 글로벌기업 트위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이나 국내의 ‘네카라쿠배’조차도 최근 수익악화를 이유로 구조조정, 대량해고를 쉽게 하는 것이다.

매월 회사에서 주는 봉급을 또박또박 받아먹다 보면 주는 먹이에 길들여져, 가축처럼 순종적으로 사육되는 '가축신세'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직장인이 조금만 긴장을 늦추거나 생각 없이 관성에 따라 직장 생활하다 보면 스스로 사육당하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불현듯 사육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일부 근거는 미래 세계를 다루는 그 어떤 영화, 게임 (상상 속)에서도 갑이 자취를 감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여전히 건재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직장인 을은 상생과 힘의 균형을 희망하지만, 강자인 '갑'(회사, 사장, 보스)들은 자기가 가진 힘의 사용을 즐기고 싶어 한다. 힘이란 사용되고 실현되어야만 그 쾌감이 현실화되어 피부로 와닿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에서 힘의 균형은 항상 강자인 갑에 의해 파기되었다.


이때 큰 권력, 큰 갑일수록 직접보다는 간접적으로, 무대 위보다는 무대 뒤에서 힘을 발휘한다. 조지 오웰의 <1984>의 빅브라더처럼 화면에 비치는 배우가 아니라 화면뒤 PD나 작가처럼 말이다. 또한 이처럼 과거 우리가 상상했던 미래가 점차 현실화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다 같이 희망하는 ‘미래에는 갑질이 없어질 거’라는 낙관적 희망과 기대는 지금 이 시대 이 순간의 착시나 환상에 불과한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든다. 유감스럽게도 기술의 진보와 철학적 성찰을 통한 시간의 흐름은 인간의 ‘갑질’ 욕망을 다소 억지하기는 했으나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도 거의 희박하다.

그러므로 지금 곧 ‘갑의 소멸’을 실현을 할 것처럼 부르짖는 노동운동이나 선거공약으로 내세우는 정치선동에 대해서는 희망을 접는 것이 좋을 것이다. 상대 존재의 부정이나 완전소멸은 사이다이고 속 시원한 말이지만, 가능성 없는 거짓 목표와 투쟁에는 끝없는 소모전이 예고될 뿐이다. 거기에는 근거 없는 이념이 덧칠해질 것이고 서로에 대한 아픈 상처의 기억만 축적되어 갈 것이다. 어차피 미래 계속 존재할 상대라면 차라리 면밀한 상대분석과 세련된 협상 기법을 통한 전략적 접근이 좀 더 미래 지향적 선택이 아닐까. 그리하여 미세하나마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현실적인 우리의 희망이 될 것이다.

그림=최송목


글: 최송목, CEO전략전문 컨설턴트, 『사장으로 견딘다는 것』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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