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지영칼럼> 아이티에 기적을. .

김윤수 기자 승인 2024.04.03 16:21 의견 0
남네바다주립대교수

아이티가 폭동과 폭력 그리고 오래된 가난으로 신음하고 있다. 게다가 2024년 일어난 작금의 사태는 오리무중으로,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할 지 모를 지경이다. 아이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이러한 내용들이 전부다: 지진이 크게 났었고,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나라. 최근에 더해지는 뉴스들은 저 나라에 희망이 있을까 싶기도하다.

히스페니올라섬

이 나라는 미국과 중남미 지역 중간에 있는 섬으로, 1492년 콜럼버스가 발견했다. 처음엔 쿠바와 함께 히스파니올라 섬이라고 불렸었다. 아이티는 스페인을 거쳐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1804년 흑인노예들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30년 후, 아이티는 프랑스로부터 식민지 독립에 성공한 세계 최초 흑인공화국이 되었다. 이 혁명 중심에는 부두교와 로마카톨릭교의 두터운 신앙심이 있었다고.부두교는 서아프리카 지역의 신앙체계를 통합한 혼합종교라고 브리태니카 사전에서 밝히고 있다. 과거 헐리웃 영화에서 비춰지던 장난같은 종교는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티 갱단이 1,000명의 케냐 파견군을 반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AP통신 뉴스를 토대로, 아리엘 헨리 대통력직 취임부터 살펴보자. 2021년 조브넬 모이스(Jovenel Moise) 대통령 암살 사건에서, 암살연루자로 강력한 의심을 받던 당시 총리 아리엘 헨리(Ariel Henri)는 미국을 포함한 서구권의 강력한 지지로 대통령직까지 수행하게되었다. 이후 아이티는 헨리 정권을 반대하며 폭동이 끊이질 않았다. 2023년, 아이티의 법과 질서를 회복시킨다는 목적으로, 유엔안전보장 이사회는 1000명의 케냐 보안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반목하던 아이티의 갱단이 케냐 보안군을 결사반대하며, 불가능해 보이던 동맹까지 맺고 저항한다. 2023년 11월, 케냐 대통령 에크루 어콧(Ekuru Aukot)은 케냐군대를 아이티 파병하는 것에대해 반대한다. 갱단의 폭력이 더욱 심화되자, 2024년 3월 아리엘 헨리는 케냐 군대 파병을 직접 요청하러 출국 한다. 이에 맞서, 갱단은 수도 포르토 프랑스와 공항을 점령한다. 케냐군대를 그렇게도 반대를 한 이유가 외부군대여서였을까? 미국의 입김이 들어갔다고 판단해서 였을까? 스페인이 카리브해 지역을 포기하고 떠나게 한 ‘미서전쟁’ 이후, 카리브해 지역은 한동안 미국의 주도권 아래 있었다. 아이티도 한동안 미국의 통치권 아래 있었다.

갱 리더: 지미 ’바비큐’ 셰리지에

BBC뉴스에서 주목한 갱 연합 두목이 있다. 전직 경찰이었던, 지미 ‘바비큐’ 셰리지에(Jimmy ‘BBQ’ Cherizier)는 갱단 중 하나인 G-9을 이끌고 있다. 그는 시작부터 유투브에서 G-9 창설을 알린바 있으며, 자신의 메세지를 지속적으로 전파했다. 셰리지에는 알 자지라 뉴스 인터뷰에서는 자신을 ‘혁명가’라고 소개한 바 있다. 지금은 이름대신 흔히 ‘바비큐’라는 별명으로도 부른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치킨바비큐 노점상을 한 이후로 생긴 별명이라고 한다. BBC 뉴스에 의하면, 갱두목 ‘바바큐’는 정부보다 지도력을 잘 발휘할 수 있다 주장했다고 전한다. 갱연합은 아리엘 헨리의 총리 사임을 요구하며, ‘내전과 대량학살’ 경고를 했다. 아리엘 헨리는 2024년 3월 11일 총리직에서 사임한다. 이후, 아이티에 주재하던 유럽연합 대표단과 각국 대사관들이 속속들이 철수 했다. 로이터 뉴스에 따르면, 미국은 전세기를 준비해, 자국민 탈출을 적극 도왔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아이티 갱단 지도자를 만나려던 미국인 유투버인 에디슨 피에르 마로프(Addison Pierre Maalouf)가 이주동안 납치되었다가 만우절인 4월1일에 풀려났다.

아이티에 평화를

현재, 유엔안전 보장 이사회는 외부지원군이 5,000명은 필요하다고 전하고 있다. 아이티 혁명군을 자처하는 갱단은 케냐 지원군 1,000명마저도 시민들의 목숨을 보루로 결사항전 자세로 임했다. 과연 5,000명 외부 지원군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그보다는 우선 총을 비롯한 무기 공급원부터 찾아서 끊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알자지라 보도에 의하면, 아이티는 무기를 자급생산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대 역사 평가는 다를수도

어떠한 국가라도 민족적 자긍심이 있다. 아이티의 역사를 알게되면, 자긍심은 높을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게된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아이티의 역사를 간략하게라도 정리해 전하고 싶었던 이유이다. 세계 최초, 노예 스스로의 투쟁으로써, 프랑스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성취한 그 자부심은 대단할 것이다. 불행히도 민족적 자부심과 경제적 성과는 동일하지 못했다.

독립직후의 아이티안, 그들을 대신해 역설해본다. 정치, 경제, 행정, 외교등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노예들로 구성된 초대행정부였다. 자본의 무서운 속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식민지 지배에 열을 올리던 열강들의 배척 속에서 외교라는 줄타기에 능하지 못했다. 외교적 궁지에 몰렸다고 판단한 아이티 초대정부는 프랑스와 굴욕적 협약을 맺는데, 이 협약이 아이티를 영원한 가난의 굴레에 빠뜨렸다. 사탕수수가 주력 상품으서 만들어진 협약이었으니, 다른 상품 개발을 하고 판로개척도 했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한편으로 교육의 부재도 한 몫을 했다. 식민지 통치기간 중에 교육이랄 것이 있었겠나 싶다. 지속된 경제파탄으로 가난은 배고픔을 동반하고 사람들은 ‘진흙과자’를 구워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본인 스스로 혁명가를 자처하는 갱 리더: 지미 ‘바비큐’ 셰리지에를 주목해서 지켜본다. 과연 그는 잔인무도한 갱리더인가, 후대에는 다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역사를 어떻게 서술하는지에 따라서 영웅이 되기도하고 안되기도 한 경우를 보아왔다. 아이티를 식민통치했던 나라,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정말 영웅이었던가? 장군이었던 나폴레옹은 혁명가가 되었다. 쿠데타도 일으켰고, 스스로 왕관을 쓰고 왕도 되었다가, 마지막엔 유배지인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 된 후 일반인 삶의 기록 중에 대다수가 부자가 되어 배불리 빵을 먹으며 살았다는 기록은 없다. 나폴레옹에게 질문하고 싶다. 누구를 위한 혁명이었고 왕이되었는가를 말이다. 대중도 배를 주렸고, 결국엔 본인도 섬으로 유배를 갔으니 말이다.

아이티에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

역사는 돌고 돈다. 아이티 밖에서 우리들은 서방세계가 주는 뉴스들을 접하게 되는 현실이다. 수많은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아이티의 평화를 희망한다. 폭력 속에서 고통받는 시민들에게 하루빨리 평화가 깃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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