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 칼럼] 삶은 덧없는 것으로 구성된다

김영진 승인 2023.07.25 08:14 의견 0
김영진교수. 화이트헤드학회장 [사진=더리더스타임즈]


[김영진 칼럼] 우리는 지식의 범람 속에 살아간다. AI와 빅데이터는 모든 정보와 지식을 아주 편안하고 빠르게 전달한다. 이런 지식과의 만남은 대다수의 일상에서 증가하고 있고, 우리는 그런 지식과 어울림 속에서 세상과 주변사람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이해한다. NAVER 혹은 DAUM이라는 사이트를 보면, 몇 개의 범주로 세상 소식을 나누어서 우리에게 전해준다. 우리는 거의 매일 실시간으로 그런 정보와 지식을 통해서 세상과 마주한다. 그런 지식과 정보가 정말 ‘실재(reality)’라고 할 수 있는가? 챗GPT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삶과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 그런 정보와 지식이 정말 진정한 만남의 장을 구성하는 것인가? 물론 그런 지식과 정보와의 만남은 우리를 훨씬 똑똑하게 만들고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끔 이런 철학적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그런 지식이 정말 <실재 Reality>인가?

스피노자는 삶은 만남이라고 한다. 어떤 만남이든 기쁨과 슬픔을 준다. 우리는 언제나 기쁜 만남만을 유지할 수도 없고, 슬픈 만남만을 유지할 수도 없다. 만남은 언제나 기쁨과 슬픔의 교차이다. 기쁨과 슬픔이라는 형용사는 언제나 명사가 아니라 동사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부사에 가깝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 속에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남은 하나의 사건이고 그 사건에는 언제나 기쁘다 혹은 슬프다라는 부사가 뒤따른다. 자 그렇다면 어떤 만남이 우리가 원하는 만남인가? 우리는 만남이라는 필연적인 사건 속에서 가족, 친구, 연인의 의미를 한 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왜 가족을 구성해 살까? 우리는 왜 친구가 필요할까? 우리는 왜 연인이 필요할까?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그 대답도 아주 쉽다.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대부분의 삶은 그런 친구, 연인, 가족이라는 단어보다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 홍수, 여행, 취업, 주식 등에 더 관심을 둔다. 물론 그 이유도 알기 쉽다. 그것은 삶을 연명하는데 중요한 수단들이며 뇌에 즉각적인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요즘 친구, 연인, 가족이라는 단어 속의 의미가 너무 쉽게 내팽개쳐지는 느낌이 있다. 소중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왜 소중한지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수용하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거창한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에로스라는 의미로 묶일 수 있다. 에로스는 덧없고 보이지 않는 힘이지만,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를 보여준다. 지식과 에로스가 지향하는 방향이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 보자.

가끔 우리는 어른을 위한 동화책이라고 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들추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인간의 삶의 패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리는 어린 시절에 키운 부모님을 멀리하고 도시에 나와서 이것저것 지식을 탐색하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살아간다. 어린 왕자도 자신의 별에서 꽃을 사랑하지만 더 많은 모험을 위해서 이별한다. 서로가 헤어지면 이렇게 말한다. 꽃은 왕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 난 너를 사랑해, 당신이 그걸 몰랐던 건 내 탓이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하지만 당시도 나처럼 바보였어, 부디 행복해.>

그 말을 멀리하고 왕자는 꽃을 떠나서 모험을 시작한다. 왕자는 마치 불교의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처럼 수많은 만남을 통해 배워간다. 결국 어린 왕자의 여정은 사랑과 행복을 배우는 과정이다. 왕자는 지구에 오기 전에 여섯 명의 남자를 만난다. 그 중에서 지리학자의 만남을 생각해 보자. 지리학자는 요즘 말로 지식인이다. 지리학자는 아주 두꺼운 책에 증거를 수집하는 일을 한다. 가령, 바다와 강, 도시와 산 그리고 사막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는 일을 한다. 왕자는 자신의 별을 기록하려는 지리학자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한다. <내 별은 크게 흥미롭지 않아요. 아주 작거든요, 화산 세 개가 있고, 그중 두 개는 활화산이에요, 하나는 휴화산이고요. 하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죠. 꽃도 있어요. 지리학자는 말한다. 우리는 꽃은 기록하지 않아. 왕자는 반문한다. 어째서요? 가장 예쁜 것인데! 지리학자는 꽃은 덧없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리학자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만을 기록하고 사라질 위험이 있는 덧없는 것은 기록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후에 왕자는 지구에 와서 모험을 하면서 자기 별에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장미’를 지구에서 만난다. 그는 수천 송이의 장미를 만나고 슬퍼서 운다. 왜냐하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꽃이 있어서 내가 부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자기 별의 장미와 지구의 수천 송이의 장미는 똑같은 장미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슬퍼한 것이다. 여기서 생텍쥐페리는 지리학자와 수천 송이의 장미는 영원한 것과 동일한 것을 통해서 우리가 지식을 습득하고 배워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마치 전문가들이 객관적인 지식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행히 왕자는 운이 좋게도 여우를 통해 세상에는 똑같은 장미가 없다는 것을 배운다. 왜냐하면 길들여지지 않은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우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넌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작은 소년에 불과해. 그리고 나는 네가 필요하지 않아. 너 또한 내가 필요 없지. 너에게 난 수 많은 여우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네가 날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가 필요해지는 거야. 너는 내게 있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소년이 되는 거고, 나는 네게 있어 세상 단 하나의 여우가 되는 거지.>

여기서 길들여진다는 것은 기쁜 만남이며, 길들여지지 않는 것은 슬픈 만남임을 여우는 주장한다. 가령, 여우는 사냥군의 발자국이나 밀밭은 자신을 슬프게 하는 만남이지만, 왕자의 발자국과 금빛 머리카락은 자신을 기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여우는 왕자의 발자국과 머리카락은 자신이 길들여지기 때문에 사랑하게 된다고 말한다. 길들여지지 않는 삶은 친구나 연인을 만들 수 없다고 하면서, 여우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배울 시간이 없어서 가게에서 기성품만 사지. 하지만 친구를 만들어 파는 가게는 없으니까. 그들에겐 이제 친구가 없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사고 팔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친구, 여인, 가족을 파는 곳은 없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그것은 덧없는 것이기도 하고 너무나 쉽게 깨어지기 때문이다. 여우는 덧없는 만남인 친구, 여인, 가족을 길들이는데는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고 한다. 길들임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가까이에 앉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곁에 있는 친구, 연인,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시간을 함께 보내고, 서로에 대한 무한 신뢰를 보내는 관계이다. 하지만 그것은 덧없고 쉽게 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변하지 않는 안정된 돈의 숫자와 지식에 매몰되어 사는 경우가 많다.

생텍쥐페리가 말하는 ‘꽃’은 아주 덧없는 것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에로스는 너무나 부드럽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딱딱해지면 그곳을 떠난다고 한다. 생명은 굳으면 죽음으로 향해 가는 것이다. 우리는 금방 태어난 아이나 동물들이 얼마나 부드러운지를 안다. 죽음에 가까이가면 모든 것이 딱딱해지고, 시체가 되면 더 이상 그런 부드러움을 유지할 수 없다. 이 덧없는 부드러움이 <실재>이기에 사람들은 고통에 빠진다. 부처가 말하듯이 고통은 변화 속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기에 사람들은 안정이라는 미명하에 영원하고 변화하지 않는 추구하는 것이다.

한편 근대 철학자 헤겔은 그 누구보다 관계에 대해 많은 철학적 사유를 전개했다. 그는 근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 개인에게는 관계의 개념이 빠져 있다고 주장했다. 실재는 관계이며,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와 같은 <실재>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가 설명하는 변증법은 관계를 설명하는 방법론이다. 이후에 이것은 마르크스를 통해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설명하는 유물론의 변증법을 탄생시켰다. 과연 그런 관계가 <어린 왕자>에서 말하는 길들여진 관계인가? 헤겔과 마르크스의 관계는 추상적인 관계이다. 예컨대,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다’는 명제는 가장 일반적인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것은 진화론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명석판명한 명제이다. 우리는 이런 지식을 학교에서 충분히 배워 왔다. 문제는 시의적절함에 있다. 배부른 늑대나, 아픈 늑대 등은 양을 잡아먹지 못한다. 여기에는 ‘하나의’ 늑대와 ‘하나의’ 양의 관계가 없다. 진정한 관계란 <경험된 사물과 경험하는 행위의 일관된 개별성(particularity)>에서 보는 관계여야 한다. <그 늑대와 그 양을 그 시간 그 지점에서 잡아먹는다는 유일한 관계가> 빠진 것은 추상적인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과 정보는 우리의 삶에 유익한 수단이지만, 그것은 길들여진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우리는 시장에서 사 와서 먹는 가축과 집에서 키워서 먹는 가축은 결코 같은 수가 없다. 나는 어린 시절에 닭을 키우면서, 그 닭을 잡아먹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한 경험을 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런 부정관사를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제 차이가 없는 <견고한 지식이라는 성>에 갇혀 살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미국에서 활동한 화이트헤드라는 철학자는 그 늑대와 그 양이 잡아먹히는 관계를 ‘파악’(prehension)이라고 하며, 우리는 <미>를 통해서 실재를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파악은 아름다운 세 가지 구성요소로 되어 있다. 파악하는 주체, 파악된 여건, 그 주체가 그 여건을 파악하는 방식인 주체적 형식이다. 이 파악은 자기 실현 과정이며, 발산하는 조직체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 관계는 언제나 구체성을 띤 유일한 파악이며, 그것이 실재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라는 책에서, 어떻게 우리는 흘러가는 덧없는 것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이제 철학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덧없고 변화 속에서 아름다움을 봐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과연 그런 <실재>의 삶이 이해될까?

코로나 19와의 만남은 우리에게 슬픔을 안겨주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기쁜 만남을 찾는 방식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제가 아는 수의사에 따르면, 코로나 19이후에 개와 고양이와 <길들여진 관계>가 폭발적으로 들었다고 한다. 즉, 코로나 19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개와 고양이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길들여진 관계이다. 가족, 친구, 연인과의 관계가 힘들어진 시기에 우리네는 어린 왕자와 같이 돌볼 수 있는 꽃과 같은 존재가 내 옆에 있기를 원했다. 새로운 가족, 새로운 친구, 새로운 연인을 강아지와 고양이가 대신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변해 가지만 한 번도 우리는 그런 덧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길들여진 관계를 포기한 적이 없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실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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