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시대의 몸삶은 안녕한가? 현대 철학자 화이트헤드(A. N. Whitehead)는 활력 있는 문명의 진보를 위해선 진리(Truth), 아름다움(Beauty), 모험(Adventure), 예술(Art)과 함께 마지막으로 평화(Peace)를 추구할 것을 손꼽았었다. 흔히 <평화>라고 하면 아무런 대립 충돌이 없는 평탄한 시대나 그런 평온한 상태를 떠올리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평화의 반대 상태를 떠올린다면 일반적으로 비극이나 전쟁 국면을 거론할 것이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여기서 평화의 가짜 대체물로서 <마비>anaesthesia의 상태와 혼동해선 안 된다는 점을 밝혔었다. 즉 아무런 대립 충돌이 없는 상태일지라도 그저 운신의 폭이 제한된 상태 또는 활동의 억제를 갖는 상태라면 이는 진정한 평화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 국제관계의 정세뿐만 아니라 남북관계 역시 심각한 대립 충돌로만 나아가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에 있다. 국제관계나 남북관계도 그러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 전체가 치르고 있는 온갖 소모전의 대립 갈등 충돌들은 또 어떠한가? 정치판의 보수와 진보는 대립 갈등 관계를 치러야만 꼭 사회가 발전한다고 보는 것인가? 물론 대립 갈등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것이 생산적인 관계로 가지 못하고 자꾸만 반복적으로 치르는 피로한 소모전의 관계로 갈 경우 문제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이성(reason)의 반대는 감성이 아닌 <피로>fatigue라고 했었다. 그것은 정작 참신한 가능성들을 봉쇄시키고 제거하면서 퇴행으로 이끈다.
기업 및 조직 사회 안에서도 여러 심각한 대립 갈등 관계들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은 지난 역사에서 국가전체주의의 심각한 폭력으로 소중한 생명들이 죽기도 했던 여러 비극들을 경험한 터라 이제는 국가뿐만 아니라 기업 및 조직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항상 정당화할 수만도 없는 시대를 또한 맞이하고 있다. 따라서 시대의 방향은 점차로 개인의 권리와 행복을 제약하지 않으면서도 조직 전체 및 공동체의 이익을 도모해가는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성과 중요성도 점점 더 느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기업의 기술 발전과 상품 생산도 자기 이익만 고려하는 것이 아닌 환경(Environmental), 사회적 책임(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라는 ‘ESG’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에까지 이르렀다.
더 나아가 이제는 지구사회가 ‘인간중심’만 생각하는 한계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각성도 요구되고 있다.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로도 불리는 이 시대는 인간이 오히려 생태교란종의 주범이 되어 멸종을 일으키는 온갖 비극들을 자행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노벨상 수상의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P. J. Crutzen)은, 인류세를 제기하면서 자본주의 산업혁명 이후로 대기에는 급속히 오존층에 구멍이 나면서 지구는 점차로 새로운 지질연대로 들어섰다고 진단했다. 보고된 조사에 따르면 인류의 활동 및 환경변화로 인해 “매일 10여 종이 멸종하는 가운데 현재 대멸종이 진행되는 속도는 과거 대멸종의 1000배에서 1만 배로 추정된다”고 할 만큼 심각하다고 한다. 현재 국제적으로 기후변화 위기에 대한 공동 대응을 모색하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건대 이 모든 관계들은 우리와 몸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그러한 관계들이 실제적인 몸의 형성 요인들로 자리한다. 몸이 있고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형성되는 관계들에 의해 우리의 몸이 매순간 형성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따라서 이 모든 관계들에서 평화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건강한 몸삶도 그만큼 멀어질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비가 아닌 평화의 실질로서 <시너지>synergy 관계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아직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서 그것을 평화로운 상태라고만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마비>일 수 있다. 진정한 평화란 마비가 아닌 운신의 폭이 더 확장되는 시너지로 가야 한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시너지란 단지 어떤 대립 충돌이 없는 상태 정도를 말한 것이 아니며, 보다 적극적인 <동반상승의 관계>로 가야 한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물론 그 반대는 제로섬 게임으로 결국 어느 한쪽이 없어져야 평화한다고 보는 일방 관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국제관계든 남북관계든 기업 및 조직과의 관계든 생태학적 관계든 이들을 전략적 파트너로 삼아 상호이익을 더욱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이 꼭 요원하기만 한 것일까? 예컨대 대립 갈등의 남북관계보다 오히려 교류협력으로 더 큰 시너지의 공동 이익들을 창출할 여지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럴 경우 진짜 전쟁가능성을 훨씬 더 낮추고, 소모적인 대립 갈등의 피로함보다 오히려 폭넓게 운신할 가능성을 훨씬 더 높이는 쪽은 과연 어느 방향이겠는가?
평화란 억제의 제거이며 마비와 근본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필자는 이 지점에서 시너지야말로 진정한 평화로 보는 것은 그것이 생산적 활동을 위한 운신의 폭을 훨씬 더 확장시킨다는 점에 있다. 이는 국가들 간의 관계나 조직 및 공동체 사회와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인접한 이웃과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여실히 예증된다. 정말 불화하는 사람이 옆집 이웃이거나 내 가족 구성원으로 함께 살고 있다면 불화한 만큼 운신의 폭 역시 줄어드는 제약과 억제의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불화한 이웃이나 가족 때문에 간단한 지름길을 놓고도 훨씬 더 길을 빙 둘러서 가는 피로한 소모전을 치르는 경우도 봤었다. 껄끄러운 가족의 방은 접근이 힘들어지고 그저 침묵과 참음으로 살아내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화해를 넘어 시너지의 관계를 갖는다면 그 활동의 반경은 훨씬 더 넓어질 수 있고 이익도 훨씬 더 극대화할 수도 있잖은가! 그렇기에 화이트헤드가 주장처럼 평화란 개별적 인격성을 넘어선 상태를 가리킨다.
물론 몸삶의 모든 관계를 평화해야 한다는 건 당연히 힘들 것이지만 적어도 그러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더 낫다고 본 점에선 이를 우리 몸삶의 커다란 기본 좌표로 삼는 일만큼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음식도 정보도 내 몸을 형성한다. 전쟁의 시대, 대립 갈등의 소모전, 제로섬 게임, 일방적 관계 등 이러한 시대의 몸삶은 만성스트레스가 되어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에도 교란을 일으킬 수 있지만, 반대로 화해 협력 및 상호이익 증진의 추구로 좀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시대와의 불화로 인한 스트레스는 그만큼 줄어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 몸삶의 건강을 훨씬 더 증대시키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시대의 안녕과 몸의 안녕은 항상 결부된 채로 진행된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 <각자도생의 시대>라고 하여 제 살 길만 찾거나 상대가 없어져야 내가 살 수 있다는 제로섬 게임을 하는 이들도 여전히 많은 실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일수록 사회지도자로서의 리더의 역량들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혼돈의 시대를 이끌만한 훌륭한 리더의 역량과 덕목도 바로 이 시너지[동반상승]의 길을 발굴하고 찾아내서 이를 현실화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시너지가 곧 평화이자 지속가능한 승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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